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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 로맨틱한 산책, 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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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비로드

글,사진 홍유진

에디터 최현주




출처 : 네이버캐스트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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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전위 김구림

본능적 엇박으로 춤춘다


  

철 들자 망령이라는 말이 있다. 예술은? 철 들면 종말이다. 만만한 걸 반복하고 싶어질 때그 예술가는 시들기 시작한다. 여기 제도권 바깥에서 생을 바쳐 모든 틀을 깨부수어 온 해체주의자가 있다. 1936년생 청년 작가는, 이제 시작이다.

KTX매거진/ 글 김은성 사진 이규열


    

‘A는 질문하고 B는 답변한다는 인터뷰의 포맷에 김구림은 도무지 흥미가 없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평생을 몰두해 온 주제에 관하여 헤쳐 놓기 시작했다. 쿵짝쿵짝 끝없이 이어지는 내리 한판. 마침내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찰나. 고작 질문 한 가지를 던졌고 아니나 다를까, 이내 사근하게 타일러졌다.

그것은 이따 나옵니다. 잠시 기다리시오.”

망했군. 오십 개가 넘는 질문을 적은 종이를 호주머니 속에서 구기며 귀를 기울였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비전포럼에서 퍼포먼스 ‘1981 5 27-손톱과 시를 재연하기 위해 방문한 그를 만났다. 한국 실험미술을 개척한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한 시기는 1969. 상실의 시대, 몰인정한 사회에서 김구림의 활동은 가히 갸륵할 정도였다. 그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갸우뚱한다.

호기심을 못 참아요. 궁금한 걸 그저 풀어내다 보니.”


하나의 신체에 예술가 열의 영()이 깃든 것일까. ‘누가시켜서도 아니고, 누구에게 배워서도 아닌 타고난 자연스러움으로 그는 작품을 뽑아내었다. 페인팅, 판화, 조각, 설치, 오브제, 무대 미술, 연극 의상 디자인 그리고 퍼포먼스 한 점 한 점이 불가해의 예술이다. 작품의 종과 양, 에너지 모든 면에서 김구림은 (세간의 못된 지칭처럼) ‘미친놈이었다.

눈앞의 장면이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바뀌었고 이야기는 나는 안 팔리는 작가예요로 끝이 났다. 예술의 안팎을 무람없이 오갔을 뿐인데, 소년이 청년이 되고 어느새 머리 하얀 노인이 되었으니 어쩐지 서러운 마음이 들려는데, 그가 웃는다. “예술은, 다만 즐거운 일 아닌가요?”

자신이 누구인지 낯설게 만들어 이 휑하고 빤한 인생을 의심케 하는 게 예술의 본령이라면 그는 이번에도 완벽하게 성공했다. (나는 녹취록을 몇 번이나 던지며 글쓰기란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긴, 일생 동안 그는 질문에 답해 본 일이 없다. 지루한 세상을 향해 활활 불타는 구두를 던지듯 질문을 보냈고, 수신 확인이 되지 않아도 보내고 또 보냈으므로. 우리에게 조금 일찍 도착한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예술가를 몇 개의 조각으로 전해 보려 한다. 퍼즐의 윤곽은 그의 작품을 직접 찾아보며 맞추어 나가기를.

 

쓰레기통 뒤적여 건진 예술

미술대학이라고 들어갔는데, 이거 뭐 빵떡모자 쓰고 야외 나가 풍경이나 그리는 수준이었어요.” 어렴풋이나마 세계 미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던 것일까. 청년 김구림은 학생의 질문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미대를 두 학기 만에 관둔다. 유명짜한 현대 미술가를 찾아 조언을 구해도 보지만, 그의 집 문턱도 넘지 못하고 이런 소리를 듣는다. “장사나 하시오.”

하지만 스스로 소회하듯 밟힌 만큼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성격은 예술에 대한 열망을 더욱 달굴 뿐이었다. 자퇴 후 헌책방을 순례하던 어느 오후, 그는 누군가 보고 버린 잡지 <타임> <라이프>를 보고 개안한다. 개념을 언어화할 수는 없었지만 그토록 찾아 헤매 온 예술이 쓰레기 더미에 있었다. ‘미제 잡지의 미술은 형식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애티튜드였다.

바닥에 흩뿌린 물감, 벽에 기대어 선 빗자루도 예술이라는 거예요. 예술을 이루는 요체는 기술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이란 걸 깨달았지요.”

당대 예술가들은 언어와 사진, 수치와 사물 등 각각의 기호들을 부정하고 통합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영자 텍스트를 온전히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그 따위 무슨 문제였을까. 김구림은 서구 예술 작품을 자신의 사고와 감각으로 던지고 굴리고 부수었다.그런 다음 제멋대로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시대는 제4집단을 무뢰배라 불렀다

1969년 을지로 소림다방. 새소리와 바람 소리, 소울과 사이키 속에 박수 소리가 일렁일렁 리듬을 탄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넘은 4부 문화부단체를 만듭시다!”


13명의 예술가가 무체사상이라는 미학 개념 아래 모였다. 김구림을 통령으로 마임니스트, 화가, 의상 디자이너, 기자, 시나리오 작가, 음악가 등이 기성 문화로부터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명동 거리에 넝마를 깔고 예술과 연극!’이라 외쳤다. 길에 나서서 사람들에게 흰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봉투 안에는 찢어진 콘돔과 쥐약처럼 보이는 가루(실제로는 인체에 무해한 카바마인)를 넣었다. 전태일의 분신, 김민기의 아침이슬’, 김지하의 필화 사건이 일어난 1970년대의 일이다. 기성 언론의 경악과 한탄은 당연했다.

“10대 불량배의 난동보다 도가 지나치다. 젊은이들조차 이문제아들에게 깊은 우려를 표한다. 이들의 해괴망측한 행동은 언론의 관심을 누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4집단은 차츰 전국 면 단위까지 퍼져 나갔다. 이윽고 1970년 광복절. 백기를 들고 관을 둘러멘 제4집단 멤버들은 한강에서 기성 문화를 장사 지내기 위해 행진한다. 시청 앞에서 미리 대기하던 경찰에 의해 포위된 멤버들은 당황한다. 교통방해죄로 체포된 김구림은 그날부터 괴로움을 좀 겪었다.

이북에서 자금을 받았지? 집단이라는 게 대체 정체가 뭐야?”

며칠인지 모르게 비몽사몽하는 와중 눈앞에 청요리 한상이 차려진다. “배가 부르니 정신이 듭디다. 죄수도 죽이기 전엔 배불리 먹인다던데 오늘이 내 사형일이구나 싶었지요.” 눈이 가려지고 어딘가로 차가 이동했다. 안대가 벗겨지자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소리가 들린다. ‘땅땅땅, 무죄!’

알아보니 실상은 이러했다. 4집단이 와해된 동안 주간지 데스크들의 한숨이 깊었던 것. 1면을 차지하던 이슈 메이커가 사라지니 판매 부수가 급감했고, 이윽고 국장들은 남대문경찰서장에게 김구림을 내놓으라고 전화를 걸었다. 당시 남대문경찰서장은이거 자칫하면 나도 곤란해지겠구나.” 싶어 재판정으로 짐을 넘겼고, 재판정도 속결로 처리해 버렸다. 하지만 그리 간단치는 않았다. 이후 반년간 전국 어디를 가든 미행자가 집요하게 따라붙었고, 고향의 부친도 경찰서에 끌려가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제4집단의 해체를 선언한다. 이 기기묘묘한 집단은 단 1년 활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김구림은 그 시간을 통해 평생 지속해 나갈 작업의 바탕을 다질 수 있었다.

 

내 이름은 구림, 언덕  수풀 

원래 본명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아뿔싸, 공교롭게도 열 살 위 선배와 이름이 같았다. 새 이름은 은사인 백낙종 선생이 준 것이다. 언덕에 돋아난 풀. 그 이름에서 현상에서 흔적으로-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를 기억하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1970 4 11일로 돌아가 볼까. 여기는 한양대학에서 뚝섬으로 이어지는 살곶이다리다. 근처에서 한동안을 불한당처럼 서성이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 ,  시계 괘종이 꼭 열한 차례 울리자 강변 위에 우뚝 선다. 사내는 도둑처럼 재빠르게 경사진 둑에 빗금을 긋기 시작한다. , ,  사선은 빗살무늬 토기의 무늬와 닮았다.

 

돌연 불을 지르기 시작하는 사내. 선으로 가두어진 면들을 겅중겅중 건너서 달리며 방화하는 그에게 구경꾼의 시선이 꽂힌다.둑은 이내 쥐불놀이처럼 검붉게 타오른다. 탄 곳과 안 탄 곳이 삼각뿔을 이루며 거대한 무늬가 되었다. 폭은 22미터 총길이는100미터. 한 달 후 탄 곳과 안 탄 곳의 구별 없이 대지는 새싹을 틔웠고 방화의 흔적은 전부 사라졌다. 대지는 어떻게 미술이 되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했다. 당시 회화의 주재료였던 캔버스도 조각의 주재료였던 청동도 쓰지 않고 그는 예술을 했다. 그날 사내가 든 불씨에 의해 예술은 비물질화되었고 대지미술이 태어났다. 영국의 대지미술가 리처드 롱도 인도에서 불태우기 작업을 한 바 있지만, 김구림보다 훨씬 늦은 최근의 일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외과의사

초등학교 때부터 외과의를 꿈꾸었고, 미국에서는 외과의인 지인에게 졸라 수술실에 조수로 들어가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요소들이 해체되고 통합되는 일에 집중해 온 그에게 메스와 바늘은 그리 낯설지 않으리라. 2000년 미국에서 돌아와 마주한 한국은 피를 흘리고 잔뜩 붓고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환자의 이미지였다.

텔레비전에 나온 옛 가수는 하도 성형을 해서 괴물처럼 보였어요. 거리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갓 뽑은 마네킹 같았고요.”

연남동 대안공간 플레이스막에서

열린 음양 시리즈는 성형천국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구성했다. 주제는 사라진 아름다움’. 전시 공간은 어둑한 성형외과가 됐고, 그 안은 미간에 쇠가 박힌 얼굴 부조, 물 안의 뱀, 조각난 마네킹 팔과 머리, 가짜 사과로 가득 찼다. 이 실험적인 전시는 특히 청년들에게 화제가 됐는데, 한번은 미술관 관계자가 이 김구림이 김구림 화백인가, 동명의 청년 작가 김구림인가?” 물어오기도 했다.

 

학연과 인맥의 잣대 위에서 뛰노는 광대

하나는 촌놈이 보통이 아니구먼.” 다른 하나는 건방지게 촌놈이 꺼떡거리고 말이야.” 김구림에게 따라붙은 말이다. 경북에서 갓 올라온 청년이 소위 엘리트들 사이에 침범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잘나고 못나고는 토론으로 가려 봅시다. 언제고 결판이 날 때까지.”

못 하겠다면 우스워질 게 뻔했으므로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양측에 증인을 둘씩 세우고 예술이 무엇인가를 논하며 밤을 지새우는 젊은이들. 어떤 학자도 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어 백전백승을 거두는 이 예술가에게 사람들은 매혹되었고, 그는 당대의 가장 놀라운 소문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움과 다름이 당대에 받는 취급이란 흔히 구박과 배척일 따름이다. 대학을 자퇴한 시골 출신, 게다가 국민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어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며 인맥과 학연을가뿐히 무시하는 예술가는 위험분자였으리라. 이후 걸레와 빗자루,이불과 삽 등 일상의 물건을 활용한 설치미술로 단숨에 1970년대 일본 화랑들의 슈퍼스타가 된 김구림을 한국 비평가들은 아주 잠깐 받아들였을 뿐이다. “한국은 이상하게 남이 먼저 알아 줘야 다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호도 잠시, 미술계는 김구림의 전위성을 이단 취급했고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2012년 미국 테이트모던갤러리에는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신디 셔먼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김구림 세 글자가 나란히 걸렸다. 한국인으로서는 백남준 이후 두번째였다. 1969년 당시 서울에서 여자 모델의 몸에 그림을 그린 보디 페인팅 퍼포먼스 사진이 전시됐다.미국에서 활동하는 15년 동안 한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 미술계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미단의 폐쇄성은 더 심해져 있었다. 국내 미술관이 작품을 구입하기로 했다가 하루 만에 취소한 일도 있었다. 가격을 후려치는 관행에 질려 그는 앞으로 작품을 안 팔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김구림은 정체성이 무어냐, 일관성이란 게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내 작품이 잘 안 팔리지요. 꽃이면 꽃,물방울이면 물방울 평생 하나만 그리면 잘 팔리니까요. 하지만 예술가라면 마땅히 시대에 뛰어들고, 그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고 봐요. 시대가 변하면 사고가 바뀌고 작품도 변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내가 비정상입니까? 나는 과거를 우려먹고 싶지 않습니다. 뒷걸음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죽기 전까지 계속 실험을 할 생각입니다.”



KTX매거진

글 김은성

 사진 이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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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브랜드가 성공할 때, 세계는 한뼘 더 좋아진다



그는 아이디어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 힘을 좋은 브랜드가 성공하도록 하는 일에 쓰기를 원한다. ‘광고주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을 바꾸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업에 지치는 법이 없다.


글 김은성 사진 황종현


 

KS: THE IDEA COMPANY는 웰콤의 전성기를 이끌며 천재 기획인이라 불렸던 이근상 대표가 이끄는 회사다. 아우디 코리아를 비롯 CJ해찬들, 뉴욕라이프, 해태음료, 진에어 등의 광고 캠페인을 만들며 제품개발, 네이밍, 브랜드컨설팅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고 있다. 이 독립광고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길을 만났을 때 가장 흥을 내어 일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아우디 TV 광고는 우리나라의 뛰어난 건축 디자인과 아우디의 첨단기술을 근사하게 조우하게 만들었다. 탤런트 김혜수가 ?요리하는 여자야라며 고추장으로 파스타를 만드는 해찬들의 광고는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다.


사무실을 찾아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아기 진돗개 산이였다. 낯선 이의 품에 꼬리를 흔들며 파고드는 모습에 직원들 사랑 듬뿍 받는 태가 난다. 10년간 머무른 강남의 사무실을 떠나 풍경 좋은 남산 자락에 사무실을 얻었고, 이후 개를 길러야겠다 생각이 들자 바로 진도에서 산이를 데려왔다. “떠오른 생각은 실천해야 직성이 풀리지요. 뭘 해야겠다 싶으면 끝을 봐야 해요.”

요즘은 산이와 남산에서 산책하는 즐거움에 빠졌지만 할리데이비슨과 아이스하키도 그의 오랜 취미다. 8년 동안 탄 할리 데이비슨을 커다란 말을 집안에만 가두어 둔 듯한 미안함에 분주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종종 몰고 나간다. 주말이면 아이스 링크 위에서 보디체크를 즐긴다. 고강도 스트레스 업종이라고 알려진 광고업계에서 스무 해가 넘도록 지내고 있는 이 대표다. 그럼에도 일상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취미에 몰입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는 것. “머리란 게 비우자고 맘 먹는다고 비워지는 게 아니잖아요? 집중할 수 있는 일로 머리를 채워야 잡념이 빠져 나가죠 그의 표현에 의하면 새 세입자가 들어와야 이전 세입자가 나간다’. 바이크나 아이스하키처럼 1초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이 위험해서 더 효과적이다.


아이디어란 참 무정해서, 열 시간을 꼬박 앉아 고민해도 단 하나의 명쾌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그럴 때가 더 많다. 이 대표는 그럴 때 가장 위험한 발상은 “10시간 해서 안 돼? 그럼 20시간 붙잡고 있어야지!”라고 말한다.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하는 모든 직업인에게는 리부팅의 힘이 중요하다. 고민에 고민을 계속하다 문득 다른 것에 집중했을 때, 속을 다 털어버렸을 때 번뜩! 좋은 생각이 나온다는 것. 기필코 찾고야 말겠다는 집중력과 옳은 방향만 가지고 있다면, 열심히 딴짓을 하는 것도 괜찮다. 그런다고 그동안 입력한 데이터들이 설마 날아가기야 할까. “최고의 아이디어는 처음의 발상으로 되돌아갔을 때 나와요. 내내 고민하던 아이템들이 새로 정리되고 엄청난 논리로 재포장되는 거죠.”

나이가 들며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재능의 힘을 믿던 예전에 비해 지금은 연륜과 인풋의 힘을 더 믿게 됐다. 시행착오의 경험, 시간의 힘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최근 십년 새에는 받아들임에서도 더 겸허해졌다.

대개 젊을 때 많이 읽고 보고 듣고, 나이가 들어 그 지식을 일로 전환한다고 하지요? 제 경우는 반대예요. 나이가 들어 눈이 뜨이면서 지식을 수용하는 폭과 깊이가 달라졌어요. 열기가 좀 줄은 대신, 울림통의 크기를 키웠달까요.”

요즘에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역사 책을 즐겨 읽는다. 그에게 책은 아이디어를 위한 게 아니라, 삶 전체를 위한 것이다.

아이디어는 타율에 의해 산출되는 게 아니다. 때문에 KS: THE IDEA에서는 각자 스케줄 관리에 철저하되, 되도록 늦게까지 근무하지 않도록 한다. 한달에 한번, 셋째주 금요일에는 역사, 사회, 문화 등 업무와 관계되지 않은 강의를 듣고 12시에 퇴근한다. “평일 낮에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공식적으로 놀아보라는 거죠.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보이거든요.”

이근상 대표는 직원들에게 업의 본질에 대해 강조한다. “우리의 업은 광고주를 위한 게 아니다. 우리는 좋은 브랜드가 세상에 더 잘 알려지도록 돕는다.” 라는 것. 그래서 이 회사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해당 브랜드의 근본을 샅샅이 탐구해 새롭고 벼려진 아이디어를 내놓고자 한다.

환자가 말하는 10가지 증상에 10가지 약을 주는 게 가장 나쁜 방법이에요. 예컨대 피부가 뭐가 나는 게 순환기나 소화기의 문제일 수 있는데, 이 경우 피부과 약을 바르는 게 아니라 내장을 치료해야죠. 의사에게는 진짜 문제를 분석할 의무가 있어요.”

때로는 클라이언트가 준 브리프와 전혀 다른 방향의 답을 가져간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성공 확률은 고작 3분의 1’. 하지만 그 진단이 정곡을 찔렀을 때, 클라이언트와 KS: THE IDEA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종종 상대가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번 다시 해오랄 때가 있죠. 그럴 땐 거절해요. 직원들의 사기와 자존심을 위해서예요. 나는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회사에 대한 믿음이 돈보다 훨씬 귀중해요.”


아우디 매거진

글 김은성

사진 황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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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마음이 이루어낸 맑고 푸른 빛

조각가 이영학의 이끼 정원



이영학의 오래된 정원은 그의 작품이 품은 담박함과 간결함을 닮았다. 옛 돌을 쪼아 낸 야트막한 홈에 맑은 물이 찰랑거린다. 물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가 온화한 햇볕과 어울려 보기 좋다. 돌과 물과 풀의 꾸밈없는 어울림. 선생은 그것이 삶이라 말한다. “예술가의 생활이란 한 인간이 성숙하는 길과 다르지 않아요. 그침 없이 단련해 맑은 물이 되어 가는 거지요. 금이 아니어도 좋아요. 덜 완성됐어도 그 과정이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예술은 덤덤한 노력 그 자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KB프리미엄 맴버십 매거진 <골드앤와이즈>/글 김은성 사진 김재이

 

 

“저걸 하나 훔쳐갈까.” 오랜 벗의 전시에 붙여 소설가 박완서가 건넨 글에서 가장 도드라졌던 글줄이다. 아무렇지 않게 놓인, 그래서 슬쩍 하나쯤 들고 가도 자리도 안 나게 생긴 돌확을 보다가 생겨난 삿된 마음을 고백한 말이다. 이영학이 물을 담아 풀을 기르기 전의 돌확은 그저 묵직한 바위일 뿐이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이 돌도 전시냐”고 물었을 정도다. 예술가의 작업에 별다른 더함과 뺌이 없다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오랜 세월 이맛살을 찌푸리며 유일한 단어와 문장을 고르기 위해 애써 온 문장가는 생각한다. 꾸밈과 애씀이 없어 보기에 이리도 마음이 편안한 것일까. 벗의 작품은 시간에 닳아 더없이 자연스러워진 정자의 댓돌 같았다. 대갓집의 주춧돌처럼 듬직했다. 정을 들고 돌과 맞서는 대신 오래 바라보고 어루만진 덕이다.

그리하여 소설가는 벗의 속내를 곰곰 짚어본다. “이영학이 돌에게서 찾고 싶어 한 것은 숨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더 깊이 숨긴 돌의 꿈이 아니었을까?” 예술가의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아니라 다감한 기다림이 모든 작품에 닿아있다. 조금 수줍고 그만큼 잔정 많은 그의 성정은 돌과 이끼, 풀과 나무, 너른 흙에 거름처럼 고루 배어들었다. 정원과 작품 사이에 경계가 전혀 없다. 생활과 창작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다.

 

연하고 수줍고 원초적인 초록의 향연

앞서의 글을 떠올리며 언덕을 오르다가 ‘이곳이구나’ 감이 왔다. 북한산 자락이 이어지는 수유동에 자리한 이영학의 집. 돌이 켜켜이 쌓여 있어 멀리서도 단단한 기운이 감지된다. 문을 열고 들어서노라니 어쩐지 아득해진다. 좁다란 길 양편에 책이나 LP처럼 쌓여있는 작고 큰 돌덩이들. 작품이라기엔 무던하고 자연이라기엔 하나 하나 남다른 오묘한 경지. 이끼와 풀과 나무가 품은 초록의 결이 무척 다채롭다. 연한 푸름 짙은 푸름 어둑한 푸름이 오롯한 개성을 품고서 하나의 커다란 푸름이 되어 있달까.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여름 고의 적삼을 걸친 선생이 현관에 서 반기고 서 있다. “무릉도원 같네요.” 얼이 빠져 제대로 된 어휘를 고르지 못하고 뻔한 말을 내뱉으니 선생이 웃는다. “사철 좋지만 초여름의 정원은 그만이지요. 창밖으로 바라보면 아, 좋다! 좋아! 소리가 절로 나와요.” 그러고 보니, 계절을 맞아 점점 깊어지는 햇볕이 이 무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듯 하다. 주단 같은 이끼와 열심히 솟아오르는 대나무, 맑은 물 고인 돌덩이가 보드라운 햇살과 바람 안에 또 다른 세계가 되어 있다. 순하고 고요하되 밖을 향해 결계를 친 듯 고립적이다.

“늘상 쇠를 깡깡 치고 돌을 다듬는데 도심의 개미집 같은 아파트에서 살 수가 있나요. 너른 마당이 있는 집이어야만 했어요.” 바스락 바스락 타오르는 벽난로 소리를 들으며 선생의 말을 듣는다. 손수 기름을 먹인 베니어 합판의 것인지 응접실 가득 놓인 고목의 것인지 은은한 향내가 이야기의 정취를 더한다. 선생의 부모님은 북에서 피난 해 와 부산에 터를 잡고 살았다. 오르면 산이고 나가면 바다인 곳에서 어린 시절 내내 천하의 장난꾸러기로 지낸 어린 영학. 잇몸이 죄 시커매지도록 머루를 따먹으며 해가 다 지도록 뛰어다녔다.

두 발로 대지의 중력을 느끼고 두 손으로 공기의 흐름을 느끼던 기억을 품고 소년은 어른이 됐다. 정통 조각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로마에서 8년간 조형문화를 공부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한국의 담담한 아름다움이 그리웠다. 많이 가지려 하고 많이 알려 하는 욕망을 고만 다스리고 텅 빈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니 두고 두고 살 집을 고르면서도 선택의 기준은 복잡하지 않았다. 첫째, 벗과 일이 있는 서울에 살되 자연과 닮은 곳이길 원했다. 둘째,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넓으면 청소만 번거롭다는 심산이었다.

 

돌과 물과 풀이 서로 어울리네

이 집에 산지 서른 해가 가깝다. 서울 한복판에 깊은 정원을 가꾸며 ‘고생길 훤하겠다’ 걱정도 됐지만 멈출 수야 없었다. 이끼를 키우기 위해서는 서둘러 굵은 모래를 깔고 밑공사를 새로 다 해야 했다. 골방에서 작업에 빠져있다가 잠시 허리 펴고 둘러보며 휴식과 사색을 취하는 귀한 공간이니 정성을 거둘 수 없었다. 오브제와 공간이 무람없이 어우러지길 원했다. 게다가 대한민국 제일 가는 예술가의 안목을 말해 무엇하랴.

“나는 울긋불긋한 꽃을 안 좋아해요. 푸른 색깔만 원하기에 특히 이끼를 아끼는데 이 녀석이 유여간 까다로워야지요. 이끼는 음의 식물이라 볕을 세게 쬐면 일순 타 버려요. 타지 않게 습도를 잘 맞춰줘야 살지요. 얼핏 자라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요? 습도와 온도에 따라 자라는 정도가 미묘하게 달라요. 사시사철 내가 원하는 정도로 알맞게 기르려면 작품을 한 개도 못 만들 겁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해요.(웃음)”

정원을 가꾸어보면 안다. 얼마나 계절에 민감해지는지. 사철이 뚜렷한 한국 땅이다 보니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가꾸는 법이 다르다. 이끼와 대나무와 은행나무의 법이 각각이다. 어느날은 고개 한 번 못 들고 부부가 종일 잡풀을 뽑는다. 게다가 제대로 할라치면 1시간마다 물을 살금살금 뿌려주며 촉촉함을 유지해줘야 이끼가 잘 자란다. 실수로 물이 고이면 이끼가 썩기 때문에 늘 보슬비 내리듯 해야 하니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내외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정원은 사람이 부지런히 살기 위해 가꾸는 것이구나” 그래도 정원 덕에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 쉴 틈 없이 움직이니 두 뺨은 불그레해지고 눈빛은 반짝인다. 새벽같이 일어나 저녁이면 잠이 드니 작업 일정을 어기는 일도 없다.

볕과 물의 정도를 세심하게 조절해 줘야 하는 까탈스러운 선태식물. 그럼에도 이영학은 이끼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된다고 고백한다. 사랑을 준 만큼 표시가 난다는 점이 본인의 우직한 성정에 맞는다. 잘 자란 이끼를 볼 때마다 사람의 힘과 시간의 무게를 다시 한번 배우게 된다.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는 강직한 점도 마음에 든다. 잠든 듯 조용했던 포자들이 눈을 헤치고 봄을 맞아 다시 올라오면 생명의 싱그러움이 느껴져 덩실덩실 춤추고 싶을 정도로 벅찬다.

무기교의 기교, 최소한의 표현을 담은 작품들

이영학에게 정원이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예술과 직결되는 장소다. 그는 버려진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해 왔다. 십수년간 전국을 돌며 낡은 농기구와 살림도구를 주워 모으자니 장돌뱅이 같고 대장장이 같았다. 그의 손에서 장날 엿장수 손에 딸각거리던 가위는 소가 되었다. 어머니 손에 닳디 닳은 다리미를 오리로 만들었다. 연탄집게에 낫을 더하면 한 마리 학이다. 기막힌 눈썰미로 적합한 모양의 도구를 쏙쏙 골라 상상의 힘을 더한다.

 

세월의 풍상이 더한 돌도 그가 오래 천착해 온 소재다. 정원에 놓인 돌들은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점 한 점 놀라운 예술 작품이다. 질박한 질감을 그대로 살린 채 가운데를 네모나 동그라미, ㄱ자로 파 낸 화강암의 고아함이 일품이다. “없는 걸 새로이 만들어내는 건 내키지 않습니다. 본래 있는 것에 조금의 정성을 더하는 최소한의 작업이 즐겁지요. 거추장스러운 것은 지우고 반드시 있어야 할 알맹이만 담는 게 내 방식입니다.”

 

정원이 사람에게 구원이 될 때

가장 좋은 식재료를 골라 몇 시간부터 요리를 준비하고 손님이 도착할 시간이면 미리 문에 나와 있는 성정. 그의 수많은 벗이 증언하듯 이영학은 사람을 참 정성스럽게 대하는 이다. 그럼에도 사람을 만나면 살갑기보다는 ‘디게 틀털할’ 뿐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눈을 맞추지 못하고 수줍음을 감추지도 못하고 맥주를 마셨다)

서울에 오래 살았어도 제 고향 말을 버리지 못하는 경상도 사람이고, 사무적인 사회관계를 어려워 해 잃은 것도 많다. 예술에 관해서는 한사코 타협하지 못하면서도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 예술가로서 말못할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얼 잘 모르겠고 많은 것이 막막할 때마다 일어서 정원을 내다 봤다. 들숨 날숨을 몇 번 쉬면 다시 돌과 쇠를 만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정원이 구원이 될 수 있다 권한다.

“소비하고, 소비되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지칠 때 당신만의 정원을 가꾸세요. 자연은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지만 늘 새로운 방식이니, 틀림없이 신비를 느낄 것입니다. 늘 두고 보면 어느새 낙천적이 돼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겨울이면 이끼가 눈에 덮이지만 봄이 오면 또 파랗게 올라옵니다. 그러니 슬플 일도 우울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정원에서 매일 아침 숨을 들이마시세요. 작은 구원이 되어줄 겁니다.”



KB프리미엄 맴버십 매거진 <골드앤와이즈>

글 김은성

사진 김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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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치킨 문화매거진 <해피투데이>

글 김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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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14 15: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ant-man 담벼락지기 2016.06.14 1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 이렇게까지 길게 안적어도 보내드리는데 ㅎㅎ 당장 보내드리고 싶은데, 스마트폰 버잔에서 보내는 방법을 모르겠네요. 내일 보내드릴께요.하루만 기다려주세요 ^^

양꼬치의 추억!

 

 

 

11년 전, (사)지구촌사랑나눔에 입사했다. 대표와 나와의 인연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최저급여보다 몇 만원 높은 급여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동참하자는 대표의 권유에 한 달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과연 그 돈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외국인노동자/중국동포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흘러 약속한 날에 맞춰 다시 찾아갔다. 생각은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만나기 직전까지도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물론 몇 마디 나누지 않고 그 일을 하겠노라 결정을 했지만 말이다.

현재 하는 일이 그 때 했던 일의 연장선 상에 있으니, 그 때의 결정이 10년 넘게 나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셈이다.

 

'좋은 일 한 번 해보자' 야심찬 포부를 갖고 일을 시작했다. 하나 둘씩 업무도 배웠지만, 허드렛 일이 내 일의 대부분이었다. 밤샘 운전도 하고, 쉼터 리모델링 공사 잡부 역할도 했다. 때론 본국으로 송환해야 하는 시신을 공항까지 실어나르기도 했다.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인가보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1년 정도 흘렀을까. 법무부 경찰 합동으로 불법체류자 단속을 실시한다고 언론에서 떠들어댔다. 불법체류자들은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단속이니만큼 일터는 물론이고 지하철 역 주변, 주택가 등등 구석구석이 단속 대상이다보니, 그들이 피할 곳은 거의 없었다. 불법을 저질렀으니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대로 쫓겨나면 본국에 돌아가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쫓겨다니는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고 있었기에 전재산은 물론 1천만원 1천5백만원 아니 그 이상 돈을 빌려 한국 땅을 밟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외국인노동자도 중국동포도 있었다.

 

두려움에 떨다 못해 자살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소식이 하나 둘 씩 들려왔다. 이대로 쫓겨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외국인노동자도 중국동포도 있었다. 드림을 꿈꾸며 택한 코리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절망과 눈물의 코리아였다. 이대로 두고볼 수는 없는 일. 센터는 비상 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중심으로 긴급 농성에 들어갔다. 강제추방을 반대하며 추위를 뚫고 농성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추방반대 시위는 시작됐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의 연이은 시위에도 자살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농성장에서 동포들과 한 솥 밥을 먹었다. 이미 일터는 농성장으로 옮겨졌고, 우리의 일도 농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농성이 점차 장기화되면서 식사 문제도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다행히 노숙인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목사님이 식사를 책임지겠노라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식사 팀을 구성하여 하루 3끼 식사를 퍼다 날랐다. 상담소 막내였던 내가 자연스레 식사 담당을 하게 되었고, 새벽 당번만 교대로 하고 점심 저녁은 내가 날랐다. 동포들과 하루에도 몇 시간씩 함께 부대끼며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중국동포들과 가까워졌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식사 나르러 가는 길은 칠흙같은 어둠 속에 한 줄기 희망이었다. ​​

 

장기 농성은 여차저차 마무리 되고, 우리 팀은 그동안의 노고를 자축하며 함께 식사를 했다. 당시 중국음식 특유의 향신료에 거부반응을 보이던 내 미각 덕에 중국음식은 언감생심. 보쌈집에서 저녁을 거하게 먹고 마무리했다. 그렇게 가끔 저녁에 모여 함께 식사 하면서 우리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모임은 계속 이어졌지만, 마음 한 켠에 '나 때문에 한국 음식만 먹게 해서 미안하네'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중국 본토요리가 속에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어차피 사람 먹는 음식인데 까짓거 먹어보자'였다.  

 

그래서 함께 찾아간 곳은 양꼬치 가게. 이전에도 양꼬치는 몇 번 먹어봤다. 처음 먹는 사람도 잘 먹는다는 양꼬치인데, 내 입맛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꼬치를 앞에 두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가상했는지 대견해 하면서도, 이것만 먹고 한국 식당으로 가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 제안은 나를 더욱 자극했고 그 다음 번에도 또 그 다음번에도 계속해서 중국식당을 고집했다. 그렇게 이어진 몇 차례의 시도 덕에 못 먹던 음식이 하나 둘 씩 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진한 향의 고수도 그렇고 각종 향신료도 그랬다. 그렇게 1년 여가 흘렀을까. 웬만한 중국사람보다 중국음식을 더 찾게 되었다. 때론 저 고수 못먹어요 라는 중국인들이 내가 중국음식 먹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노력의 결과인지, 나를 보는 중국인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김치나 된장찌개 맛있게 잘 먹는 외국인을 보면, 신기해 하면서도 한 편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우리의 모습. 아마도 중국인이 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런게 아닌가 싶었다. 어려운 일은 분명 아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더욱 가까워 질 수 있다는 생각이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로인해 그들과 나 사이에 그어져 있던 굵은 선 하나를 시원하게 지워버리고 당당하게 그들과 소통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 온 이주민들에게 김치, 비빔밥 만드는 방법은 친절하게 가르치면서 정작 그들의 음식에 대해선 무관심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김치나 된장 잘 먹는 외국인 보면 박수 치고 환영할 줄만 알았지, '내가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나를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은 과연 얼마나 해봤을까.

 

요즘은 선후배나 친구들과의 모임을 대림동 중국식당에서 종종 갖는다. 중국음식 못 먹어본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다. 물론 입맛에 안맞는다 투덜댈 수도 있지만,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들의 음식 한 번쯤은 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이 되어버린 대림동이 서울 안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한국살이를 하는 외국인,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보여주고 싶다.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일이지만, 적어도 양꼬치가 나에게 준 의미처럼 말이다.  

 

 

 

한중법률신문

허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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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홍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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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비워야 할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를 기억하는가. 소문을 내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이발사가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서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렇게라도 비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녀의 고백, 마음에 담기다

한 소녀가 있었다. 어렸을 때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던 상처를 안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나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어도 상처 입은 어린 영혼은 여전히 그녀 안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몸부림을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두꺼운 철벽으로 마음을 꽁꽁 감싸고 차갑게 얼려버렸다. 물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다고 고통이 사라질 수는 없다는 걸.

살다 보니 이따금 따뜻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잠시 그녀 곁에 머물다 갔고, 호감을 가지고 그 두꺼운 철벽 앞에서 끈기 있게 노크를 하는 이도 있었다. 차츰 얼어붙은 마음이 녹았고, 굳게 걸어 잠근 문도 빠끔히 열렸다. 이제는 그녀 차례였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문을 열고 상처 입은 영혼을 내보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깨달았다. 그 고통스런 몸부림은 자신을 그 답답하고 좁은 내면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스스로의 소망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아픈 상처를 고백해왔을 때 나는 솔직히 적잖이 당황했다. 이미 이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고, 정작 그녀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저 에휴, 힘들었겠구나.’ 낮고 침통하고 읊조릴밖에. 그녀는 난데없이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비밀을 지켜지 않은 그 이발사의 가벼운 입을 탓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이든 말이든, 무거운 비밀이든 한 곳에만 고여 있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에요. 나는 내 상처를 입 밖에 꺼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순간부터 치유될 수 있었어요.”



속을 잘 비워낼 줄 아는 사람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비밀을 밖으로 꺼낸 순간, 마음 속 꽉 막힌 응어리가 사라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물론, 가끔은 그런 그녀의 상처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멀게 대하는 이들로 인해 두 번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한 심리학자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죠?”

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남을 적당히 배려하며, 스스로의 발전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 속으로 적당히 답을 계산하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잘 비워내는 사람이죠.”

상처든, 분노든, 짜증이든 혹은 자긍심이든, 기쁨이든, 기억이든, 잘 흘려보내고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한 거란다. 이건 뭐, 해탈한 고승들이나 이야기하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아닌가. 사람 마음이 그렇게 의지대로 움직이는 거라면, 누가 고통을 그렇게 오랫동안 부여안고 살겠는가.



비우고 다시 채우는 우리의 삶

하지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반드시 그렇게 거창한 개념만은 아닌 듯 했다. 마음 그릇의 크기야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거기에 담을 수 있는 것은 한정이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거기에 분노와 화가 오래 담겨있으면 정작 기뻐해야 할 때 그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분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전히 분노해야 하는 순간에 제대로 분노하지 못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

, 마음의 그릇을 비워내지 못하면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지 못하고,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과거에만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위를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쉽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대개 과거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는 법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마음이 비워진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심리학자가 말한 '비움'의 의미를 비로소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랜 동안 괴롭혀왔던 고통을 비워내고 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는 그녀의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얼른 비워내고, 상처 입은 소녀가 아닌 활기에 가득 차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그녀로 다시 채웠다. 비로소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밝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 번졌다.

LS전선 사보​

글 홍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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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구는 '새로운 도전'

김코디네 김은희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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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센스

글 홍유진

사진 박병진




출처 : 네이버매거진 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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