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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글/홍유진

이제는 비워야 할 때 _ LS전선 사보

이제는 비워야 할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를 기억하는가. 소문을 내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이발사가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서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렇게라도 비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녀의 고백, 마음에 담기다

한 소녀가 있었다. 어렸을 때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던 상처를 안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나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어도 상처 입은 어린 영혼은 여전히 그녀 안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몸부림을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두꺼운 철벽으로 마음을 꽁꽁 감싸고 차갑게 얼려버렸다. 물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다고 고통이 사라질 수는 없다는 걸.

살다 보니 이따금 따뜻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잠시 그녀 곁에 머물다 갔고, 호감을 가지고 그 두꺼운 철벽 앞에서 끈기 있게 노크를 하는 이도 있었다. 차츰 얼어붙은 마음이 녹았고, 굳게 걸어 잠근 문도 빠끔히 열렸다. 이제는 그녀 차례였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문을 열고 상처 입은 영혼을 내보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깨달았다. 그 고통스런 몸부림은 자신을 그 답답하고 좁은 내면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스스로의 소망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아픈 상처를 고백해왔을 때 나는 솔직히 적잖이 당황했다. 이미 이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고, 정작 그녀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저 에휴, 힘들었겠구나.’ 낮고 침통하고 읊조릴밖에. 그녀는 난데없이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비밀을 지켜지 않은 그 이발사의 가벼운 입을 탓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이든 말이든, 무거운 비밀이든 한 곳에만 고여 있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에요. 나는 내 상처를 입 밖에 꺼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순간부터 치유될 수 있었어요.”



속을 잘 비워낼 줄 아는 사람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비밀을 밖으로 꺼낸 순간, 마음 속 꽉 막힌 응어리가 사라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물론, 가끔은 그런 그녀의 상처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멀게 대하는 이들로 인해 두 번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한 심리학자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죠?”

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남을 적당히 배려하며, 스스로의 발전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 속으로 적당히 답을 계산하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잘 비워내는 사람이죠.”

상처든, 분노든, 짜증이든 혹은 자긍심이든, 기쁨이든, 기억이든, 잘 흘려보내고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한 거란다. 이건 뭐, 해탈한 고승들이나 이야기하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아닌가. 사람 마음이 그렇게 의지대로 움직이는 거라면, 누가 고통을 그렇게 오랫동안 부여안고 살겠는가.



비우고 다시 채우는 우리의 삶

하지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반드시 그렇게 거창한 개념만은 아닌 듯 했다. 마음 그릇의 크기야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거기에 담을 수 있는 것은 한정이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거기에 분노와 화가 오래 담겨있으면 정작 기뻐해야 할 때 그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분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전히 분노해야 하는 순간에 제대로 분노하지 못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

, 마음의 그릇을 비워내지 못하면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지 못하고,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과거에만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위를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쉽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대개 과거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는 법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마음이 비워진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심리학자가 말한 '비움'의 의미를 비로소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랜 동안 괴롭혀왔던 고통을 비워내고 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는 그녀의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얼른 비워내고, 상처 입은 소녀가 아닌 활기에 가득 차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그녀로 다시 채웠다. 비로소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밝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 번졌다.

LS전선 사보​

글 홍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