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전위 김구림

본능적 엇박으로 춤춘다


  

철 들자 망령이라는 말이 있다. 예술은? 철 들면 종말이다. 만만한 걸 반복하고 싶어질 때그 예술가는 시들기 시작한다. 여기 제도권 바깥에서 생을 바쳐 모든 틀을 깨부수어 온 해체주의자가 있다. 1936년생 청년 작가는, 이제 시작이다.

KTX매거진/ 글 김은성 사진 이규열


    

‘A는 질문하고 B는 답변한다는 인터뷰의 포맷에 김구림은 도무지 흥미가 없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평생을 몰두해 온 주제에 관하여 헤쳐 놓기 시작했다. 쿵짝쿵짝 끝없이 이어지는 내리 한판. 마침내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찰나. 고작 질문 한 가지를 던졌고 아니나 다를까, 이내 사근하게 타일러졌다.

그것은 이따 나옵니다. 잠시 기다리시오.”

망했군. 오십 개가 넘는 질문을 적은 종이를 호주머니 속에서 구기며 귀를 기울였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비전포럼에서 퍼포먼스 ‘1981 5 27-손톱과 시를 재연하기 위해 방문한 그를 만났다. 한국 실험미술을 개척한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한 시기는 1969. 상실의 시대, 몰인정한 사회에서 김구림의 활동은 가히 갸륵할 정도였다. 그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갸우뚱한다.

호기심을 못 참아요. 궁금한 걸 그저 풀어내다 보니.”


하나의 신체에 예술가 열의 영()이 깃든 것일까. ‘누가시켜서도 아니고, 누구에게 배워서도 아닌 타고난 자연스러움으로 그는 작품을 뽑아내었다. 페인팅, 판화, 조각, 설치, 오브제, 무대 미술, 연극 의상 디자인 그리고 퍼포먼스 한 점 한 점이 불가해의 예술이다. 작품의 종과 양, 에너지 모든 면에서 김구림은 (세간의 못된 지칭처럼) ‘미친놈이었다.

눈앞의 장면이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바뀌었고 이야기는 나는 안 팔리는 작가예요로 끝이 났다. 예술의 안팎을 무람없이 오갔을 뿐인데, 소년이 청년이 되고 어느새 머리 하얀 노인이 되었으니 어쩐지 서러운 마음이 들려는데, 그가 웃는다. “예술은, 다만 즐거운 일 아닌가요?”

자신이 누구인지 낯설게 만들어 이 휑하고 빤한 인생을 의심케 하는 게 예술의 본령이라면 그는 이번에도 완벽하게 성공했다. (나는 녹취록을 몇 번이나 던지며 글쓰기란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긴, 일생 동안 그는 질문에 답해 본 일이 없다. 지루한 세상을 향해 활활 불타는 구두를 던지듯 질문을 보냈고, 수신 확인이 되지 않아도 보내고 또 보냈으므로. 우리에게 조금 일찍 도착한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예술가를 몇 개의 조각으로 전해 보려 한다. 퍼즐의 윤곽은 그의 작품을 직접 찾아보며 맞추어 나가기를.

 

쓰레기통 뒤적여 건진 예술

미술대학이라고 들어갔는데, 이거 뭐 빵떡모자 쓰고 야외 나가 풍경이나 그리는 수준이었어요.” 어렴풋이나마 세계 미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던 것일까. 청년 김구림은 학생의 질문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미대를 두 학기 만에 관둔다. 유명짜한 현대 미술가를 찾아 조언을 구해도 보지만, 그의 집 문턱도 넘지 못하고 이런 소리를 듣는다. “장사나 하시오.”

하지만 스스로 소회하듯 밟힌 만큼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성격은 예술에 대한 열망을 더욱 달굴 뿐이었다. 자퇴 후 헌책방을 순례하던 어느 오후, 그는 누군가 보고 버린 잡지 <타임> <라이프>를 보고 개안한다. 개념을 언어화할 수는 없었지만 그토록 찾아 헤매 온 예술이 쓰레기 더미에 있었다. ‘미제 잡지의 미술은 형식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애티튜드였다.

바닥에 흩뿌린 물감, 벽에 기대어 선 빗자루도 예술이라는 거예요. 예술을 이루는 요체는 기술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이란 걸 깨달았지요.”

당대 예술가들은 언어와 사진, 수치와 사물 등 각각의 기호들을 부정하고 통합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영자 텍스트를 온전히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그 따위 무슨 문제였을까. 김구림은 서구 예술 작품을 자신의 사고와 감각으로 던지고 굴리고 부수었다.그런 다음 제멋대로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시대는 제4집단을 무뢰배라 불렀다

1969년 을지로 소림다방. 새소리와 바람 소리, 소울과 사이키 속에 박수 소리가 일렁일렁 리듬을 탄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넘은 4부 문화부단체를 만듭시다!”


13명의 예술가가 무체사상이라는 미학 개념 아래 모였다. 김구림을 통령으로 마임니스트, 화가, 의상 디자이너, 기자, 시나리오 작가, 음악가 등이 기성 문화로부터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명동 거리에 넝마를 깔고 예술과 연극!’이라 외쳤다. 길에 나서서 사람들에게 흰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봉투 안에는 찢어진 콘돔과 쥐약처럼 보이는 가루(실제로는 인체에 무해한 카바마인)를 넣었다. 전태일의 분신, 김민기의 아침이슬’, 김지하의 필화 사건이 일어난 1970년대의 일이다. 기성 언론의 경악과 한탄은 당연했다.

“10대 불량배의 난동보다 도가 지나치다. 젊은이들조차 이문제아들에게 깊은 우려를 표한다. 이들의 해괴망측한 행동은 언론의 관심을 누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4집단은 차츰 전국 면 단위까지 퍼져 나갔다. 이윽고 1970년 광복절. 백기를 들고 관을 둘러멘 제4집단 멤버들은 한강에서 기성 문화를 장사 지내기 위해 행진한다. 시청 앞에서 미리 대기하던 경찰에 의해 포위된 멤버들은 당황한다. 교통방해죄로 체포된 김구림은 그날부터 괴로움을 좀 겪었다.

이북에서 자금을 받았지? 집단이라는 게 대체 정체가 뭐야?”

며칠인지 모르게 비몽사몽하는 와중 눈앞에 청요리 한상이 차려진다. “배가 부르니 정신이 듭디다. 죄수도 죽이기 전엔 배불리 먹인다던데 오늘이 내 사형일이구나 싶었지요.” 눈이 가려지고 어딘가로 차가 이동했다. 안대가 벗겨지자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소리가 들린다. ‘땅땅땅, 무죄!’

알아보니 실상은 이러했다. 4집단이 와해된 동안 주간지 데스크들의 한숨이 깊었던 것. 1면을 차지하던 이슈 메이커가 사라지니 판매 부수가 급감했고, 이윽고 국장들은 남대문경찰서장에게 김구림을 내놓으라고 전화를 걸었다. 당시 남대문경찰서장은이거 자칫하면 나도 곤란해지겠구나.” 싶어 재판정으로 짐을 넘겼고, 재판정도 속결로 처리해 버렸다. 하지만 그리 간단치는 않았다. 이후 반년간 전국 어디를 가든 미행자가 집요하게 따라붙었고, 고향의 부친도 경찰서에 끌려가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제4집단의 해체를 선언한다. 이 기기묘묘한 집단은 단 1년 활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김구림은 그 시간을 통해 평생 지속해 나갈 작업의 바탕을 다질 수 있었다.

 

내 이름은 구림, 언덕  수풀 

원래 본명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아뿔싸, 공교롭게도 열 살 위 선배와 이름이 같았다. 새 이름은 은사인 백낙종 선생이 준 것이다. 언덕에 돋아난 풀. 그 이름에서 현상에서 흔적으로-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를 기억하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1970 4 11일로 돌아가 볼까. 여기는 한양대학에서 뚝섬으로 이어지는 살곶이다리다. 근처에서 한동안을 불한당처럼 서성이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 ,  시계 괘종이 꼭 열한 차례 울리자 강변 위에 우뚝 선다. 사내는 도둑처럼 재빠르게 경사진 둑에 빗금을 긋기 시작한다. , ,  사선은 빗살무늬 토기의 무늬와 닮았다.

 

돌연 불을 지르기 시작하는 사내. 선으로 가두어진 면들을 겅중겅중 건너서 달리며 방화하는 그에게 구경꾼의 시선이 꽂힌다.둑은 이내 쥐불놀이처럼 검붉게 타오른다. 탄 곳과 안 탄 곳이 삼각뿔을 이루며 거대한 무늬가 되었다. 폭은 22미터 총길이는100미터. 한 달 후 탄 곳과 안 탄 곳의 구별 없이 대지는 새싹을 틔웠고 방화의 흔적은 전부 사라졌다. 대지는 어떻게 미술이 되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했다. 당시 회화의 주재료였던 캔버스도 조각의 주재료였던 청동도 쓰지 않고 그는 예술을 했다. 그날 사내가 든 불씨에 의해 예술은 비물질화되었고 대지미술이 태어났다. 영국의 대지미술가 리처드 롱도 인도에서 불태우기 작업을 한 바 있지만, 김구림보다 훨씬 늦은 최근의 일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외과의사

초등학교 때부터 외과의를 꿈꾸었고, 미국에서는 외과의인 지인에게 졸라 수술실에 조수로 들어가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요소들이 해체되고 통합되는 일에 집중해 온 그에게 메스와 바늘은 그리 낯설지 않으리라. 2000년 미국에서 돌아와 마주한 한국은 피를 흘리고 잔뜩 붓고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환자의 이미지였다.

텔레비전에 나온 옛 가수는 하도 성형을 해서 괴물처럼 보였어요. 거리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갓 뽑은 마네킹 같았고요.”

연남동 대안공간 플레이스막에서

열린 음양 시리즈는 성형천국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구성했다. 주제는 사라진 아름다움’. 전시 공간은 어둑한 성형외과가 됐고, 그 안은 미간에 쇠가 박힌 얼굴 부조, 물 안의 뱀, 조각난 마네킹 팔과 머리, 가짜 사과로 가득 찼다. 이 실험적인 전시는 특히 청년들에게 화제가 됐는데, 한번은 미술관 관계자가 이 김구림이 김구림 화백인가, 동명의 청년 작가 김구림인가?” 물어오기도 했다.

 

학연과 인맥의 잣대 위에서 뛰노는 광대

하나는 촌놈이 보통이 아니구먼.” 다른 하나는 건방지게 촌놈이 꺼떡거리고 말이야.” 김구림에게 따라붙은 말이다. 경북에서 갓 올라온 청년이 소위 엘리트들 사이에 침범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잘나고 못나고는 토론으로 가려 봅시다. 언제고 결판이 날 때까지.”

못 하겠다면 우스워질 게 뻔했으므로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양측에 증인을 둘씩 세우고 예술이 무엇인가를 논하며 밤을 지새우는 젊은이들. 어떤 학자도 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어 백전백승을 거두는 이 예술가에게 사람들은 매혹되었고, 그는 당대의 가장 놀라운 소문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움과 다름이 당대에 받는 취급이란 흔히 구박과 배척일 따름이다. 대학을 자퇴한 시골 출신, 게다가 국민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어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며 인맥과 학연을가뿐히 무시하는 예술가는 위험분자였으리라. 이후 걸레와 빗자루,이불과 삽 등 일상의 물건을 활용한 설치미술로 단숨에 1970년대 일본 화랑들의 슈퍼스타가 된 김구림을 한국 비평가들은 아주 잠깐 받아들였을 뿐이다. “한국은 이상하게 남이 먼저 알아 줘야 다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호도 잠시, 미술계는 김구림의 전위성을 이단 취급했고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2012년 미국 테이트모던갤러리에는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신디 셔먼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김구림 세 글자가 나란히 걸렸다. 한국인으로서는 백남준 이후 두번째였다. 1969년 당시 서울에서 여자 모델의 몸에 그림을 그린 보디 페인팅 퍼포먼스 사진이 전시됐다.미국에서 활동하는 15년 동안 한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 미술계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미단의 폐쇄성은 더 심해져 있었다. 국내 미술관이 작품을 구입하기로 했다가 하루 만에 취소한 일도 있었다. 가격을 후려치는 관행에 질려 그는 앞으로 작품을 안 팔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김구림은 정체성이 무어냐, 일관성이란 게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내 작품이 잘 안 팔리지요. 꽃이면 꽃,물방울이면 물방울 평생 하나만 그리면 잘 팔리니까요. 하지만 예술가라면 마땅히 시대에 뛰어들고, 그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고 봐요. 시대가 변하면 사고가 바뀌고 작품도 변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내가 비정상입니까? 나는 과거를 우려먹고 싶지 않습니다. 뒷걸음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죽기 전까지 계속 실험을 할 생각입니다.”



KTX매거진

글 김은성

 사진 이규열





Posted by ant-man 담벼락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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