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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글/허성환

양꼬치의 추억! _ 한중법률신문

양꼬치의 추억!

 

 

 

11년 전, (사)지구촌사랑나눔에 입사했다. 대표와 나와의 인연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최저급여보다 몇 만원 높은 급여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동참하자는 대표의 권유에 한 달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과연 그 돈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외국인노동자/중국동포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흘러 약속한 날에 맞춰 다시 찾아갔다. 생각은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만나기 직전까지도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물론 몇 마디 나누지 않고 그 일을 하겠노라 결정을 했지만 말이다.

현재 하는 일이 그 때 했던 일의 연장선 상에 있으니, 그 때의 결정이 10년 넘게 나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셈이다.

 

'좋은 일 한 번 해보자' 야심찬 포부를 갖고 일을 시작했다. 하나 둘씩 업무도 배웠지만, 허드렛 일이 내 일의 대부분이었다. 밤샘 운전도 하고, 쉼터 리모델링 공사 잡부 역할도 했다. 때론 본국으로 송환해야 하는 시신을 공항까지 실어나르기도 했다.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인가보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1년 정도 흘렀을까. 법무부 경찰 합동으로 불법체류자 단속을 실시한다고 언론에서 떠들어댔다. 불법체류자들은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단속이니만큼 일터는 물론이고 지하철 역 주변, 주택가 등등 구석구석이 단속 대상이다보니, 그들이 피할 곳은 거의 없었다. 불법을 저질렀으니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대로 쫓겨나면 본국에 돌아가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쫓겨다니는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고 있었기에 전재산은 물론 1천만원 1천5백만원 아니 그 이상 돈을 빌려 한국 땅을 밟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외국인노동자도 중국동포도 있었다.

 

두려움에 떨다 못해 자살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소식이 하나 둘 씩 들려왔다. 이대로 쫓겨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외국인노동자도 중국동포도 있었다. 드림을 꿈꾸며 택한 코리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절망과 눈물의 코리아였다. 이대로 두고볼 수는 없는 일. 센터는 비상 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중심으로 긴급 농성에 들어갔다. 강제추방을 반대하며 추위를 뚫고 농성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추방반대 시위는 시작됐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의 연이은 시위에도 자살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농성장에서 동포들과 한 솥 밥을 먹었다. 이미 일터는 농성장으로 옮겨졌고, 우리의 일도 농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농성이 점차 장기화되면서 식사 문제도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다행히 노숙인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목사님이 식사를 책임지겠노라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식사 팀을 구성하여 하루 3끼 식사를 퍼다 날랐다. 상담소 막내였던 내가 자연스레 식사 담당을 하게 되었고, 새벽 당번만 교대로 하고 점심 저녁은 내가 날랐다. 동포들과 하루에도 몇 시간씩 함께 부대끼며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중국동포들과 가까워졌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식사 나르러 가는 길은 칠흙같은 어둠 속에 한 줄기 희망이었다. ​​

 

장기 농성은 여차저차 마무리 되고, 우리 팀은 그동안의 노고를 자축하며 함께 식사를 했다. 당시 중국음식 특유의 향신료에 거부반응을 보이던 내 미각 덕에 중국음식은 언감생심. 보쌈집에서 저녁을 거하게 먹고 마무리했다. 그렇게 가끔 저녁에 모여 함께 식사 하면서 우리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모임은 계속 이어졌지만, 마음 한 켠에 '나 때문에 한국 음식만 먹게 해서 미안하네'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중국 본토요리가 속에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어차피 사람 먹는 음식인데 까짓거 먹어보자'였다.  

 

그래서 함께 찾아간 곳은 양꼬치 가게. 이전에도 양꼬치는 몇 번 먹어봤다. 처음 먹는 사람도 잘 먹는다는 양꼬치인데, 내 입맛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꼬치를 앞에 두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가상했는지 대견해 하면서도, 이것만 먹고 한국 식당으로 가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 제안은 나를 더욱 자극했고 그 다음 번에도 또 그 다음번에도 계속해서 중국식당을 고집했다. 그렇게 이어진 몇 차례의 시도 덕에 못 먹던 음식이 하나 둘 씩 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진한 향의 고수도 그렇고 각종 향신료도 그랬다. 그렇게 1년 여가 흘렀을까. 웬만한 중국사람보다 중국음식을 더 찾게 되었다. 때론 저 고수 못먹어요 라는 중국인들이 내가 중국음식 먹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노력의 결과인지, 나를 보는 중국인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김치나 된장찌개 맛있게 잘 먹는 외국인을 보면, 신기해 하면서도 한 편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우리의 모습. 아마도 중국인이 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런게 아닌가 싶었다. 어려운 일은 분명 아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더욱 가까워 질 수 있다는 생각이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로인해 그들과 나 사이에 그어져 있던 굵은 선 하나를 시원하게 지워버리고 당당하게 그들과 소통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 온 이주민들에게 김치, 비빔밥 만드는 방법은 친절하게 가르치면서 정작 그들의 음식에 대해선 무관심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김치나 된장 잘 먹는 외국인 보면 박수 치고 환영할 줄만 알았지, '내가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나를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은 과연 얼마나 해봤을까.

 

요즘은 선후배나 친구들과의 모임을 대림동 중국식당에서 종종 갖는다. 중국음식 못 먹어본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다. 물론 입맛에 안맞는다 투덜댈 수도 있지만,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들의 음식 한 번쯤은 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이 되어버린 대림동이 서울 안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한국살이를 하는 외국인,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보여주고 싶다.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일이지만, 적어도 양꼬치가 나에게 준 의미처럼 말이다.  

 

 

 

한중법률신문

허성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