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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글/김은성

반듯함과 수더분함 사이 _ KTX 매거진

에디터 김은성이 사는 동네 백석동

반듯함과 수더분함 사이




시골은 벌레와 거름 냄새가 싫다. 그렇다고 가로수 길에 가면 불안과 강박으로 온몸이 따끔거린다. 이런 애매하고 어정쩡한 취향의 기자에게 백석동은 오래 입어 편해진 티셔츠 같다.

글 김은성 사진 신규철


 

열 일곱,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아보는 마음은 부풀대로 부풀었다. ‘신도시라는 명칭도 신났다. 엘리베이터도 경비 아저씨도 단지 내 공원도 신기했다. 하지만 고만고만하면, 비교가 잘 된다. 백석-마두-정발-주엽으로 이어지는 신도시 동네들은 크기도 모양도 거기서 거기. 우선 동네 이름이 맘에 안 들었다. 근처에는 별빛마을, 달빛마을, 햇빛마을, 은빛마을이 있었다. 개그맨 유세윤이 백신중학교 재학 시절 공모전에서 수상한 이름이랬다. 특별해 보였다. ‘흰 돌이 많다는 뜻의 백석동은 말 머리라는 뜻의 마두동만큼 웃기지도 않았다.

신도시에 대한 감흥은 금세 밋밋해졌다. 홍대나 강남을 떠돌았다. 신입생 시절 만취해서는 아무 데나 잘못 내리기 일쑤였다. 급하게 개발된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는 모두 어슷비슷하게 생겼다. 백석역 근처엔 마두역처럼 대형서점이 있는 것도, 주엽역처럼 백화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면 부끄러웠다. “터널나이트 있는 동네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거대한 나이트클럽.”

이리 오래 살 줄 몰랐다만, 30대가 되어 몸도 맘도 편한 걸 원하게 되니 백석동의 덤덤한 듯 담박한 맛을 좀 알겠다. 정발산이10분 거리라 돈 한 푼 안 들이고 힙업 운동이 가능하며, 내려오는 길엔 정혜사에 들러 40대를 위해 고요히 기도드릴 수 있다. 몸과 영혼만 다스렸다 싶어 아쉬우면, 백석 도서관 옆 벤치에 누워 고양시 작가 선집을 읽으면 되고. 서울보다는 땅 값이 저렴하여, 일 없이 비워 놓은 널찍한 공간이 많다. 소음과 높은 인구밀도에 질려 귀가한 밤, 쉬이 쉬이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밤산책은 안정제 노릇을 한다.

 

백석도서관

서울에서 자취할 때 좀 당황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도서관이 없다니. 일산의 도서관들은 환경, 인문학 등 각각의 주제로 특화돼 있으며 인구 비례당 개수가 많아 접근도가 높고 한적해 책 읽기에 좋다. 백석도서관은 3층 짜리 아담한 건물이지만 잡지 134종과 일반도서 12만 권 이상을 알차게 보유했다. 미래 에너지 환경교육이나 청소년을 위한 글쓰기 교육 등 강의 개발도 열심이다. 아람누리 도서관처럼 인테리어가 예쁘거나 마두 도서관처럼 책이 많지는 않지만, 소박한 멋이 있다. 문의 031-8075-9090.

 

정혜사

십오년 째다. 정발산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절을 향해 다짐했다. “언젠간 꼭 들어가리.” 천주교 신자지만 절에도 관심 많다.땅 좋고 물 좋고 깊은 산 속 고즈넉한 산사도 좋지만, 도심에 파고든 절에는 자꾸 맘이 간다. 친근한 미소를 연습하는 도도한 친구 같아, 귀여워서다. 도심 포교당인 정혜사는 조계종 송광사 분원이다. 1998년 개원한 후 일산 불교 포교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 불교에 입문하는 이들을 위해 기초교리와 사찰문화, 불교 예절을 쉽게 배울 수 있는 불교 입문반을 운영한다. 불교 경전반, 참선반을 봄과 가을에 각각 3개원 과정으로 연다. 문의 031-907-8901.

 

수 한복 갤러리

우리는 광고 안 한다니까!”, “아이고. 저희 기사는 돈 안 받아요.” 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 오는 마케팅 전화 때문에 기자마저 의심했던 사장님 부부. 동네 사람이라 반기며 결 고운 치마, 저고리, 바지들을 보여 주셨다. 수 한복 갤러리는 장롱에서 오래 묵힌 한복을 고쳐 입거나, 기쁘고 특별한 날에 대여해 입을 수 있는 곳이다. 한번 온 손님은 변형한복이 아닌 정통한복이라 물리지 않는다”, “옷이 우아하고 담백하다며 단골이 된다. “동네 사람들이 자주 와 구경했으면 해요. 한복의 색과 선을 눈에 자주 담으면 마음도 건강해지거든.” 부부가 작은 가게 안에서 도란도란 오래오래 가게를 운영하는 비결도 한복 덕인가 싶다. 문의 031-902-5678

  

시민종합동물병원

소개팅에 나가 동네 자랑을 할 때마다 나불댔다. “일산에 수의사계의 허준이 계신 건 아세요?” 진료할 때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일절 입을 안 여시기에 사담 한번 나눈 적 없지만, 시민종합동물병원 원장님은 김은성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올해 열다섯 된 내 새끼 흰둥이가 아토피와 심장발작과 난소암을 이겨낸 건 모두 원장님의 묵묵한 진료 덕분이다. 홈페이지 하나 없고, 기다리는 손님들에겐 떡이나 만두를 권하는 시골스러운 병원이지만 오늘도 반려동물 커뮤니티에는 감동 의 간증이 흘러넘친다. KTX를 타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며, 해외에서 약을 주문하는 사람도 있다. 페럿 전문병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기견 체리(사진)는 얼마 전 미용 실장님에게 입양되어 종일 병원에 머물며 마스코트 노릇을 하게 됐다고. 문의 031-911-7346.

 

매드

백석동은 이른바 아저씨 술집들이 즐비하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은 골목 골목 유혹의 도가니다. 숯불에 목살과 오겹살 지지는 냄새, ‘!’하고 맥줏잔 부딪는 소리. 허름하니 속 편한 분위기의 주점들도 좋지만, 브런치에 와인 한 잔 하고픈 주말 아침도 있는 법. 얼마 전 문 연 매드의 얼룩말 무늬 파란 간판이 아기자기한 것 고팠던 백석 여자들을 끌어당긴다. 말린 과일을 넣어 구운 식전 빵과 베이컨을 아끼지 않고 달걀 노른자를 올린 까르보나라, 네 종류의 치즈를 얹은 꽈트로 피자를 먹을 수 있는 펍 앤 카페테리아. 마감이 끝나면 달려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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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고로

백석 성당에서 만나 비밀 연애를 하던 후배가 그랬다. “고로에 못 가서 너무 슬퍼요.” (고로는 성당 바로 옆!) 카페 고로는 백석동 사는 커플들이 애정할 만한 맛과 분위기를 지녔다. ‘어머니가 직접 담근 레몬청을 컵이 넘치도록 우겨넣은 레모네이드와우리나라 1호 바리스타인 대구 커피명가 안명규씨의 원두만 사용하는 커피류가 특히 좋다. 나직나직 목소리도 조용한 주인장이 직접 골라 트는 음악들은 가을밤 카페 정취를 고조시킨다. 문의 070-7582-0529.

 

유해피 심리상담센터

시끌벅적한 종로나 강남이 아니라 장바구니 들고 다니는 한적한 곳으로 상담을 받으러 갈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얼마 전, 백석동에서 채소 싸기로 유명한 엘마트가 있는 올리브 상가에 유해피 상담센터가 개소했다. 아동, 청소년, 성인이 고루 방문하지만 의외로 중장년 여성들이 많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도 맘 편히 못하는 이야기, 다 털어놓고 오세요라는 자녀의 권유에 쉽게 마음을 연다고. 세 명의 심리 전문가가 심리 검사, 심리 상담과 더불어 미술, 영화, 놀이, 연극 치료 등의 맞춤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상담 후에도 온라인, 전화 등으로 홈케어 서비스를 이어간다. 문의 031-901-0011.

 

팔각정과 알미공원

지붕을 여덞 모가 지도록 지은 정자를 팔각정이라 한다. 주로 경치 좋은 곳에, 벽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기와집을 떠올리면 된다. 알미공원에는 칠각정인 백석전이 있다. 각 하나가 빠져 그런지 심리적으로(?) 더 자유로워, 스물 초입에는 패트병 맥주와 콘칩 대포장을 부려 놓고 해가 뜰 때까지 친구들과 떠들었다. 4700여 평에 이르는 공원 부지. 쥐똥나무 울타리, 소나무와 은행나무, 버짐나무, 잣나무과 철쭉과 진달래까지 500여 그루의 수목이 술맛을 도왔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팔각정에서 술병 불던 처녀는 이제 건강을 생각해 같은 곳에서 쌈채에 현미밥을 싸 먹고 메밀차로 입가심한다.


KTX매거진

자유기고가 김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