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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글/김은성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_ 신세계 사보

만돌이 가족, 정동진에서 해돋이를 보며 새해 소망을 빌다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예부터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천혜의 명승지로 꼽혀 온 정동진, 정동진에서 십여분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묵호항으로 여행을 떠났다. 50년의 세월 동안 어두운 밤을 밝혀주었던 묵호 등대는 묵호항의 상징이란다. 언제나 등 뒤에서 가족이 걷는 길에 밝은 빛을 비추는 아빠의 마음도 이 등대와 같으리라.

 


 

연인의 설렘이란 씨앗 한 톨이 가족의 평안이라는 뿌리깊은 나무로 자라기까지

 

“휴무가 언제예요?”

“네? 왜요?”

“우리 언제 산책이나 할까요?”

 

‘쉬는 날이 언제냐’는 질문은 때로는 어떤 사랑의 시작이 된다. 그 사랑의 씨앗 한 톨이 자라나 가족이라는 아름드리 나무를 키우는 물과 햇살이 되어주기도 한다. 십년도 훌쩍 전인 어느 날의 오후, 이마트 매장의 한 순간도 그랬다.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비해 훨씬 듬직한 미소를 가진 한 청년이 패션 매장의 한 아가씨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군가 호감의 이유를 물었다면 청년은 불현듯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101가지의 이유를 풀어내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웃는 게 너무 예쁘지 않아?”“눈이 초롱초롱한 게 별빛 같잖아.”“성격도 꽤 좋아보이지? 깐깐한 고객에게도 인내심있게 끝까지 친절하더라고.”“전에 보니까 파랑색이 잘 어울려. 파랑이 잘 어울리면 미인이라잖아.”“이유가 어딨어? 그냥 좋은데!”

 

몇 번이나 망설이던 아가씨는 용기를 내어 청년과 데이트를 나섰다. 어딘가 싱거운 듯, 어딘가 소년처럼 구는 행동도 좋았고, 단둘이 있을 때 어색하게 말이 끊기는 순간이면 괜스레 ‘핫하하하’ 소리내어 웃어제끼는 것도 호쾌해서 마음에 들었다. 꿈결같은 시간이 흐르고 다섯 달 후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나, 어쨌다나. 뭐, 어떤가. 사랑은 홀림인데.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게 결혼이라는데.

 

연인의 설렘이 가족의 평안과 든든함으로 줄기를 뻗어올리고, 뿌리를 내린 지금, 딸 민지와 아들 남욱이 남매를 데리고 드라마 <모래시계>의 장면으로 유명한 정동진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3년간 이마트 이문점에서 근무하느라 아내와 아이들을 청주에 두고 생활해 오느라 어지간히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던 아빠가 용기내어 신청한 가족여행 코스였다.

 

폭우로 서울에 물난리가 났던 2011년 여름, 아빠는 여름 휴가 계획을 깨면서 미안해할 수 밖에 없었다. 기러기 아빠 생활 3년, 오랜만에 핸드폰도 꺼두고 가족과 똘똘 뭉쳐 좋은 곳 보고 좋은 것 먹자는 행복한 약속은 퍼붓는 비에 흘려가 버렸고, 결국 점포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야만 했다.

 

여행의 백미는 본디 출발 전날의 설렘과 묘한 긴장이리라. 여행 선정 소식에 야물딱진 짠순이 아내는 “공짜야?”란 첫질문으로 웃음보를 터뜨리게 했고, 두 아이는 짐을 넣었다 뺐다 하며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떨어져 지내기 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번씩 여행을 갔던지라 “아빠, 이게 ***일 만의 나들이인 것 아시죠?”“오랜만에 아버지가 장한 일 하셨습니다. 박수!” 라며 아빠를 놀리기도 하였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 ‘이렇게라도 기회가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에 기뻤다.

 

강릉 시내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18킬로미터를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작은 마을 정동진. “정동진은 한양(漢陽)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부락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래. 신라 때부터 임금님이 사해의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고. 지금도 일년에 두 번 정월 대보름과 오월 단오날에 물고기를 많이 잡기를 기원하는 풍어제도 열린대.”

뭐든 미리 읽고 공부해가는 것을 좋아하는 똘똘이 스머프 남욱이의 깜짝강의에 엄마아빠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붉게 솟는 새로운 해를 보며 흑룡의 기운을 받네

 

학교 갈 때는 궁둥이를 두드려도 졸려 하더니, 여행지에 와서는 알람도 없이 잠에서 깬 아이들. 제 스스로 파카며 목도리를 챙겨 입은 아이 둘을 앞세워 해변에 도착하니 아침 일곱시 반이다. 살을 에일 듯 차가운 바람, 한결 높고 세어진 파도의 철썩철썩 소리가 맨 피부에 닿는 듯 춥고도 춥다.

 

눈과 코만 빼꼼하게 내놓은 채 눈사람처럼 둥글게 싸맨 사람들의 모습에 쿡, 웃음이 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기다림의 마음은 모두가 같으니 꽁꽁 숨은 해 앞에서 왠지 다들 친구가 되어버리는 느낌에 마음이 따뜻하다. “진짜 춥죠?”“해 뜨는 시간이 7시 38분이래요. 정말 그때 딱 뜰까요?” 허물없이 말도 건네게 된다.

 


 

“꺄아아!”

7시 38분의 알람은 한 아가씨의 비명 아닌 비명으로 울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노래를 불러도 새침하게 얼굴을 가렸던 해가 정해진 시간이 되니 둥글게 솟아 오르는 것이, 참말 마술적인 순간이다. 해풍에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 철도를 적실 듯이 푸르고 푸른 동해, 깎아지른 해안절벽이 원래도 있었던 것이지만, 붉게 타는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몇 배나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보인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소원을 빌기도 하고, 순간을 마음에만 새기는 것에 조바심이 나 카메라 렌즈 안에 담아보기도 한다. 뭘 빌었느냐고 물으니 “비밀이예요,”라며 입에 손가락을 대는 민지의 소원은 알 수 없지만, 민지와 남욱이 아빠의 소원은 훤히 알겠다. 그리고 엄마의 소원도 아마 아빠와 데칼코마니처럼 똑 닮았을 것이다. 부모의 소원이란, 늘 하나니까.

 

 

이야기가 있는 벽화로 재해석된 논골 담길, 바다를 수호하는 ‘천사날개’ 묵호등대

 

따끈한 찌개를 끓여 먹으며 언 몸을 녹인 후 십여 분을 달려 도착한 묵호 등대마을. 등대 마을은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어르신생활문화 전승 프로그램’ 사업으로 더욱 예뻐졌단다. 공공미술 전문작가들의 컨설팅으로 완성된 스토리 벽화가 온 마을을 동화왕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벽화 아래에 선 아이들이 동화 주인공처럼 예뻐서 아빠는 연신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찰칵찰칵 누르고, 셔터가 닫히는 순간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아내의 미소도 아빠의 가슴에 새겨진다.

 

“연년생이라 아내가 어린 나이에 기르며 눈물 콧물 다 뺐죠. 남편 없이 아이들 키우느라 생활력 강해져서 못도 잘 박고 무거운 가구도 척척 옮기는 아내를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속으론 많이 미안합니다. 아내에게도 아가씨 시절 새초롬한 모습이 있었는데 말이죠. 힘들 텐데도 주말에 가면 맛있는 음식 잔뜩 해 주면서 누워서 쉬라고 해 줘요. 제가 복이 많아요.”

아이들이 저들끼리 뛰어가는 뒤편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플러를 고쳐 매 주며 한 마디 한다. 세상 어느 여자보다 귀히 여기겠다는 말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결혼 20주년에는 꼭 단둘이 해외로 여행가서 편히 쉬게 해 주겠다고. “아이구, 여행 와서 한 말 누가 믿어.”하며 곱게 눈을 흘기지만 아내도 계속 웃는다.

 

“아이들 피아노 콩쿨이며 태권도 승급심사며 함께 못 가니까 속상하고. 그래서 제가 전화하며 눈물을 보인 적도 많아요. 회사 일에 전력투구하는 남편의 모습은 물론 보기 좋지만, 아빠라는 이름 앞에서는 말할 수 없이 속상했죠. 어제 남편이 여행신청서를 읽어주는데, 또 눈물이 나더라고요. 감동했어요.”

 

바다를 수호하는 등대. 그 등대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그려진 천사의 날개. 그 앞에 어깨를 잡고 나란히 선 네 명의 가족. 딸 민지를 아빠가 부르는 별명인 ‘만돌이’를 ‘김치’ 대신 외치며 짓는 기분좋은 웃음이 모두 닮았다.

 

성격이며 외모며 아빠랑 붕어빵이고, 그래서인지 아빠를 딸바보로 만든 ‘만돌이’ 민지, 1000피스짜리 퍼즐게임을 아빠와 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똘똘이 남욱이. 그리고 힘든 기러기 가족 생활 속에서도 ‘나는 아빠다’‘나는 엄마다’를 되뇌이며 오늘도 아이들을 위해 사는 아빠와 엄마. 새롭게 돋는 해를 보며 빈 소원은 별다르지 않았다.

‘가족이 늘 함께’, 해가 하나이듯 소원도 늘 그것 하나다.

 

신세계 사보 여행기사

글 김은성 사진 유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