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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글/홍유진

부모님, 당신을 봅니다 _ LS 전선 사보

부모님,

당신을 봅니다




부모는 이래야 하고, 자식은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살짝 벗어 보자. 사랑이든, 존경이든, 효든 결국은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모 자식 간이 조금은 더 편안하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때, 부모님은 왜 그러셨을까?

지난 어버이날 즈음이었다. 지인의 트위터에 꽤 재미난 주제가 올라왔다.

,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온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부모님한테 서운했던 점들을 털어놔볼까요?’

무조건적인 감사만을 드려도 모자랄 것 같은 어버이날에 대한 통념을 깨뜨린 신선함도 흥미로웠으나 더욱 재미있었던 건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오는 리트윗 글의 억하심정(?)이었다. 만화가로 일하고 있는 어떤 언니는 어렸을 적 용돈을 모아 만화책을 한 권, 한 권 모았단다. 겨우 시리즈가 완성되던 감격스러운 날, 그동안 아무 말도 않던 엄마가 갑자기 돌변해서는 그 많은 책을 다 찢어버렸단다. 단지 일요일인데 제 방에 틀어박혀서 만화책을 보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한 겨울, 발가벗겨진 채 두어 시간동안 대문 밖에서 떨어야 했던 여덟 살의 비참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는 삼십대 남자도 있었고, 아빠의 심한 편애 때문에 가출까지 감행했던 이도 있었다. 심하게는 부모님의 외도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친척집에서 힘든 시기를 보낸 이도 있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 시대의 아들, 딸들은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다며 잔잔한 회고를 적기도 하고, ‘어떻게 부모로서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난 이렇게 상처 받았는데 자신들은 정작 기억도 못 하더라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기실, 그들의 상처는 단순히 매를 맞아서라거나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해서 생긴 게 아니었다.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감, 자식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좌절된 데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까웠다.


기억 속 앙금을 떠올리다

경건한 어버이날에 인터넷 상에서 난데없는 성토를 벌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자연스레 나는 어땠었나 생각해 보게 됐다. 가부장적이고 완고해서 어떤 세파에도 눈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어머니……. 모두 훌륭한 분들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나라고 부모님과 갈등이 없었을 리 없다.

때는, 철없는 망아지처럼 분간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허용될 것 같은 시절, 동시에 무엇을 하든 스무 살이란 찬란한 나이에 성이 차지 않아 안달이 나던 시절이기도 했다. 새내기가 돼서 처음 맞는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갓 사귄 캠퍼스커플 남자친구와 놀러갈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번 해볼까 싶기도 했다. 과 친구들과 엠티 일정도 잡고, 동아리에서는 영화를 찍기로 미리 약속을 해두기도 했다.그렇게 여러 가지 스케줄로 다이어리가 빼곡하게 채워져 갈 무렵, 아버지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를 내렸다.

너 방학동안 아빠 공장에서 일 좀 해. 어른 됐으면 부모가 하는 일도 좀 돕고 그래야지. 앞으로 방학 때는 공장에서 일하는 걸로 알고 있어.”

권유도, 부탁도 아닌 무자비한 명령이었다. 스무 살 딸내미의 사생활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더듬더듬, 나에겐 나름 소중한 계획들을 대며 소극적인 저항을 해보았지만 아빠 귀에 들릴 리 없었다. 구세주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를 쳐다봤지만 순종적인 엄마에게 무슨 힘이 있으랴. ‘집안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냥 아빠 말 들어.’ 집안에 내 편은 하나도 없었다. 첫 출근해야 할 날짜가 정해졌고, 하필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전날 남자친구를 만난 나는 통곡을 하며 부모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경제력만 생기면 당장 이 거지같은 집을 뛰쳐나가고 말거라고 울부짖었다.


부모님도 사람이다

아침 8시에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서 야근이 있는 날이면 밤 10시까지 일했다. 내 일기장은 가족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가득 채워졌고,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겨울방학 때는 모종의 가출 계획까지 세웠는데, 웬일로 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공장 일을 시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꼭 일손이 모자라서 나를 끌어들인 것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자신이 어떤 고생을 하며 우리들을 먹여 살렸는지, 조금은 이해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그 공장은 아빠가 스물넷, 그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와 동생들, 아내와 아이까지 먹여 살릴 수 있었던 지겹고도 소중한 기반이었을 테니. 다만, 그 방법이 서투르고 강압적이어서 스무 살 어린 딸의 이해는커녕 오해와 반항심만 더 키웠을 뿐이지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두 아이의 부모가 됐던 그 나이를 내가 훌쩍 넘고 보니, 새삼 그 난감함과 괴로움이 절로 느껴진다. 내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아버지는 고작 삼십대에 불과했다. 우리에게는 무섭고 완고한 아버지였지만 한편으로는 가족 부양 때문에 못 다 이룬 꿈이 안타깝고,혈기가 넘치는 젊은 청년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게 눈에 보이니 우리 부모님도 늙긴 늙으셨나 보다. 부모도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부모는 이래야 하고 자식은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만 살짝 내려놓고 본다면 지난 상처도, 앙금도 이해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여전히 모자란 자식의 자조 섞인 위안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행 아닌가. 내가 부모님을 아직 볼 수 있다는 것. 슈퍼맨이 아닌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것.


LS전선 사보​

글 홍유진